아와지 인형 자리 소개

요시다덴지로자의 전통을 계승하여

아와지시마에는 에도시대 초기부터 쇼와시대 중반까지 크고 작은 여러 닌교자(인형극단)가 있었고 아와지시마 안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여 닌교조루리의 매력을 전했습니다. 아와지닌교자는 그 중 큰 극단이었던 요시다 덴지로자의 도구를 계승해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요시다 덴지로자는 최근 발견된 「히케타가문서(引田家文書)」 겐분(元文)6년(1741) 「상정신일찰사(相定申一札事)」에 서명 날인한 38개의 극단 중 하나였습니다. 우에무라 겐노조우자(上村源之丞座)・나카무라 큐다유자(中村久太夫座)・이치무라로쿠노조우자(市村六之丞座) 등의 3개의 큰 극단과 마찬가지로 린지(綸旨:극단의 프로필 등을 명기한문서)・야구라면허서(櫓免許書:공연허가증) 등을 가지고 각 지역을 순회했습니다. 메이지20년(1887)경부터 40년(1907)경까지는 고바야시 로쿠타유자(小林六太夫座)로부터도 단원을 받아들여 젊은 단원으로 구성 된 조와 기존의 조 2개로 나누어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주요 순회지는 아와지(淡路)・토쿠시마(徳島)・카가와현의 사누키(香川県讃岐)・애히메현의 이요(愛媛県伊予)・와카야마현의 기이(和歌山県紀伊)・효고현의 하리마(兵庫県播磨)・산인도의 돗토리와 시마네(山陰道の鳥取、島根)・호쿠리쿠도의 후쿠이와 이시카와(北陸道の福井、石川) 등으로 특히 이요(伊予)지역에는 공연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덴지로자에는 이요지역의 가면만들기의 명인 멘미쯔요시미쯔(面光義光)가 만든 삼바소(三番叟)의 하쿠시키조우(白式尉)・코쿠시키조우(黒式尉)의 가면과、멘미쯔(面光)의 걸작으로 알려진 여우, 호랑이, 거미 등 동물의 머리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덴지로자(傅次郎座)의 가장 대표적인 공연은 「혼초우니주우시코우(本朝廿四孝)」로 이 공연은 마쯔야마한의 영주 마쯔히라씨의 공주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야에가키히메(八重垣姫)에게 입히도록 기모노의 우찌카케(일본 여성의 기모노 중 예식 등에서 입는 가장 겉에 입는 옷)을 하사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아와지닌교자에 소중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국화 자수가 화려하게 넣어진 후스마(襖:무대도구의 하나)도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주로부터 하사를 받은 도구는 상당히 훌륭하게 만들어져 다른 극단이 흉내 내어 만들어도 어느 것 하나 요시다덴지로자의 도구를 따를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덴지로자의 번성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분카・분세이 (文化・文政) 시대 (1804-1829)에 사누키(讃岐)의 콘삐라다이곤겐(金比羅大権現)의 금당 등을 조영할 때 몇 번이나 봉납을 했던 점, 가에이(嘉永) 6년(1853)에 산조 하치만신사에 이시도리이(石鳥居)와 코마이누(狛犬)를 봉납했던 점, 또한 메이지(明治) 13년 (1880)사누키 콘삐라구(金比羅宮)에 백엔을 봉납해 문양이 들어간 은잔을 받은 것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다이쇼(大正)5년2월、덴지로자는 애히메현 우찌코쵸(内子町) 우찌코자(内子座)의 신축개장 때 초대를 받아 11일간 공연을 했던 전단지와 공연 「이모세야마(妹背山)」 공연료 3백엔 등으로 계약한 계약서가 우찌코자에 현존되어 있습니다.

쇼화초기에는 작가 하야시후미코(林芙美子), 신파극 배우 하나야기쇼타로(花柳章太郎) 등 많은 유명인들이 덴지로자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극단과 마찬가지로 경영이 악화되어 대동아전쟁 말기부터는 휴업 상태가 계속 되었고 덴지로자의 당주는 본업과는 별도로 골동품을 취급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후 쇼와(昭和) 33년(1957) 미나미아와지(南淡路) 산조(三条)의 오오미도(大御堂) 경내에 아와지닌교 발상지라는 비가 세워지게 되었고 덴지로자의 당주가 그 발기인이 되었으나 뒤를 이을 자가 없었기에 덴지로자가 소유하고 있던 도구류와 고문서 등 일식을 아와지예술협회에 양도했습니다. 그 결과 아와지닌교자가 지금에 이르러 덴지로자의 모든 도구류를 이어 받아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아와지닌교자의 탄생

아와지닌교(인형)극은 에도시대(1603-1868)에는 토쿠시마 영주(藩主)와 지역의 유력자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전국 각지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明治)시대가 되자 시대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관객들의 관심이 다른 오락문화로 옮겨져 가게 됩니다. 또한 인형극이 갖는 수행의 어려움으로 인해 젊은 후계자가 뒤를 잇지 못하고 점차 쇠퇴해 갔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아와지닌교는 소멸될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쇼와(昭和)39년 (1964) 「아와지닌교자」가 새롭게 탄생되었고 그 후 아와지시마의 1 개의 시(市)와 10개의 읍(町)(현재는 3 개의 시)가 협력하여 아와지닌교협회를 발족했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해 미국, 유럽, 아시아, 호주 등 22번, 20개국과 1 개 지역에서 초대를 받았고 세계적으로도 평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와지닌교자의 단원들이 어린이 모임이나 초등하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동아리 활동, 청년들의 모임 등에서 지도에 힘쓰고 있으며 많은 후계자들이 현재 수행 중에 있습니다.

오백 년 이상의 역사

아와지닌교자는 옛날에는「노가케(野掛け)」라고 불리는 가설 극장을 지어 일본 각지를 순회했고 아와지닌교자 발족 당시에는 아와지닌교 발상의 지(地) 이시(市)에 있는 공민관에서 상연을 했습니다. 그 후 1968년 조수의 소용돌이(우즈시오)로 관광객이 붐비던 후쿠라(福良)항으로 이전, 1985년에 효고현이 건설한 오오나루토쿄 기념관으로 이전했습니다. 2012년 후쿠라에 건설된 현재의 아와지닌교조루리 전용극장으로 이전했습니다. 기다유(義太夫)의 이야기 전개를 중후한 후토자오 샤미센(太棹三味線) 음색에 맞추어 3 명의 닌교쯔카이의 인형들이 희로애락 가득 찬 인간드라마를 연기합니다.

아와지닌교조루리는 향토 고전 예능을 지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셀 수 없는 곤란을 겪으면서도 지금에 이르게 됐습니다. 아와지닌교자의 단원은 닌교조루리에 대한 자부심과 꿈을 가지고 후세에 전승하기 위해 매일 부단한 노력으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타유・샤미센 담당의 단원은 인간문화재이자 스승인 쯔루자와 토모지로부터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며 닌교쯔카이 역시 아와지닌교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서는 다리가 7년, 왼쪽 손이 7년, 머리와 오른쪽 손은 평생 연습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단원들은 고전 예능 계승의 어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면서 무대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측면만을 우선시하여 일본의 훌륭한 전통이 잊혀지기 쉬운 현대사회이지만 우리들 나름대로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확실히 몸에 익혀 다음 세대로 이어주고 싶다고 단원들은 이야기합니다.